ChoiHaram

Operationalized Resignation(조작화된 체념)

영어 원문에서 번역함.
원문: https://choiharam.com/blog/operationalized-resignation-en

읽기 전 일러두기

아래의 질문들은 에세이 본문의 일부가 아닙니다. 혹시나 필요한 독자분들을 위해 읽기 보조 자료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완전히 무시하셔도 좋고, 이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읽어 내려가며 스스로 답을 찾아보셔도 됩니다. 만약 에세이의 길이가 읽기에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선호하는 언어 모델(AI)에 이 텍스트 전문을 복사하여 제공한 뒤 이 질문들을 길잡이 삼아 에세이를 함께 읽어달라고 요청하셔도 좋습니다.

  • 결코 선택한 적 없는 표면에 의해 어떤 기술로 몸이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비교할 원본조차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까지 충분히 거슬러 올라가고 나면, ‘진짜 소리’라는 관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 업계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도 어떻게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가?
  • 분석의 형식을 연기(perform)하는 언어와 그것을 실제로 실행(carry out)하는 언어의 차이는 무엇인가?
  • 단순히 엄밀성을 주장하는 것보다 그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 왜 더 어려운가?
  • 측정기의 방향을 돌려, 영점을 잡을 때 기준이 되었던 바로 그 기준점 자체를 향해 겨누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 질문을 유예하는 것과 해소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 차이가 실제 현실에서 정말로 중요한가?
  • 왜 ‘체념’은 패배보다 명증함(clarity)에 더 가까운가?
  • 시스템 내부에서 대답할 수 있는 질문과, 애초에 그 시스템을 채택하기로 결정함으로써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 언어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기계는 거짓 없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가?
  • 어떤 결과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히 목격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당신이 읽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텍스트는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어떤 행위를 스스로 하고 있는가?
  • 대답되지 않은 질문 위에 세워진 작업물이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고 나면, 그 질문은 어디로 가는가?


유한 측정 공간 내에서 실재를 유예하기

서문 (Preface)

이어지는 글은 지난 수년 동안 진행해 온 작업들을 하나의 개념적 실타래로 꿰어낸 것이다. 그 실타래를 나는 ‘조작화된 체념’ 이라 부르려 한다. 작업을 하던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름이다.

여기에 언급된 각각의 프로젝트는 저마다의 상황에 내재된 고유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디지털 시스템에서 타이밍이란 얼마나 근본적인가? 양자화할 수 없는 신호가 그 시스템에 개입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기계가 자신이 거쳐 가는 모든 상태를 ‘물리적으로’ 헤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도권의 글쓰기는 그것이 형식적으로 흉내 내는 논증 과정을 실제로 수행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서로를 예상하지 못했다. 어떤 거대한 프로그램의 계획된 단계들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이 질문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고, 이 에세이는 그 기울어짐을 사후적으로 돌아본 기록이다.

이 글의 논증은 회고적이다. 이는 변명이나 사과가 아니다. 사후적으로 구성된 방법론은 사전 연구 설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주장이며, 사전 설계가 흔히 감추려 하는 어떤 사실에 대해 정직하다. 프레임은 작업의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온다는 사실 말이다.


I. 얇은 막(Membrane) - 첫 번째 표면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던 표면은, 팽팽하게 당겨져 북의 주둥이에 묶여 있던 죽은 동물의 가죽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사물놀이부에 들어간 것은 주변 모두가 삽화부나 축구부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아닌 무언가를 원했다. 3년 동안 복도와 빌린 교실, 비내리는 야외에서 장구를 연습했고, 대회가 가까워지면 정규 수업 시간을 통째로 장구 연습으로 충당했다. 그리고 그 3년의 대부분 동안 나는 그 소리가 내 것이라고 믿었다.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어 말해본 적은 없지만, 마음속 깊이 당연하게 여기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었다. 그 소리가 내 손목과 손가락에서, 내가 혹독하게 훈련시켜 얻어낸 속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이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해에, 나는 내가 인과관계의 방향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구는 양 끝이 가죽으로 막혀 있다. 한쪽은 소가죽, 다른 한쪽은 말가죽인데, 이 가죽들의 두께는 단순한 디테일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동물의 몸에 고정된 채, 어떤 소리가 애초에 발현 가능한지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내 근육이 소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소리가 내 근육을 만들고 있었다. 수년 동안 이루어진 작은 교정들. 그중 내가 선택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내가 단 한 번도 그 성질을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막이 규정한, 내가 선택한 적 없는 수년간의 미세한 교정들. 표면은 내 의도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의도가 표면에 의해 길들여지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나에게는 이 감각을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내게는 그저 북이 하나 있었고, 악기가 오히려 나를 연주하고 있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을 뿐이다. 그 이후로 내가 해온 모든 일들이 결국 그 얇은 막(membrane) 앞에 서서, 그것이 도대체 무엇에 응답하고 있는지를 묻는 과정의 변형이었다. 이것이 이 글이 여기서 시작하는 이유다.

그 후로도 나는 그 표면을 떠나지 않았다. 악기를 바꿨을 뿐이다. 중학교 졸업 무렵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10년 넘게 인디 음악씬의 작은 경제 안에서 드럼을 연주했다. 그곳은 그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고용할 여유가 없었다. 녹음에 필요한 것들 중 비용을 충당할 수 없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스스로 배웠다. 마이킹, 믹싱, 마스터링, 고장 난 모든 것의 수리까지. 이것이 언제부터 궁여지책을 넘어 나의 생업이 되었는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얇은 막의 반대편에 서 있게 되었다. 연주자가 아니라 기술자로서, 다른 음악가들이 도착하기 전에 방을 세팅하도록 비용을 지불받는 사람이 된 것이다.

마이크로폰 역시 하나의 막이다. 말가죽보다 훨씬 얇은 이 진동판(diaphragm)도 장구와 정확히 같은 방향으로 같은 일을 한다. 공기가 움직이면, 표면이 움직이고, 건너편에 있는 무언가가 그 움직임을 물려받는다. 다만 이 건너편에서는 그 물려받는 과정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달랐다. 움직임은 전압이 되고, 전압은 케이블을 타고 내려가, 프리앰프에서 증폭되고, 컨버터를 건너, 신호 사슬의 맨 끝에 도착해 하나의 ‘숫자’가 된다. 그리고 또 다른 숫자. 1초에 4만 4천 1백 개의 숫자들이 16비트나 24비트의 깊이로 쏟아진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사슬 내부의 그 무엇도 더 이상 ‘움직임’이 아니다. 나는 그 사슬 내부에서 그것을 납땜하고, 디버깅하고, 때로는 그 고장남을 지켜보고 배우며 수 년 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중 5년 정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슬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부업으로 1인 작업실을 차려 고객의 주문과 사양에 맞춰 커스텀 케이블과 패치베이를 만들었고, 제품이 작업대를 떠날 때가 되면 모든 연결부위를 일일이 테스트했다. 겉보기엔 화려할 것 없는 작업이었으나 나는 이에 깊이 몰입했다. 이 작업은 내가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 중요한 특징을 지니는데, ‘세계가 숫자로 교환되는 그 정확한 절차’를 직업적 의무로서 밀리초 단위로 낱낱이 목격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컨트롤 룸 안에서 던져지는 질문은 결코 철학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페이더(fader)와 데드라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 악기는 어떻게 들려야 하는가? 더 밝게? 더 가깝게? 아니면 더 악기 본연의 소리처럼? 내가 천 번은 넘게 읊조리거나 생각했을 바로 그 마지막 문구가, 결국 균열을 일으키고 깨졌다. 악기 본연의 소리처럼. 진짜 소리처럼. 하이파이(Hi-fi): 고충실도(High fidelity). 도대체 무엇에 충실하다는 것인가?

그 의미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지시 대상(referent)은 아득히 멀어지기 시작한다. 진동판에 닿는 소리에 충실해야 하는가? 마이크를 한 뼘만 옮겨도 소리는 완전히 달라진다. 둘 중 어떤 위치도 ‘진짜’는 아니다. 그렇다면 방의 소리에 충실한 것인가. 방 안의 어느 위치에서? 연주자가 듣는 소리에 충실해야 할까? 연주자는 악기 뒤편, 음향적 그늘에 서서 어떤 관객도 결코 듣지 못할 소리를 듣는다. 어떤 귀에도 닿기 전인, 진동 그 자체에 충실한 것인가? 하지만 그때 그것은 아직 소리가 아니라 그저 공기 중의 변위일 뿐이며, 그것을 소리라고 부르는 순간 청각신경이 살아있는 인간 청자가 슬며시 들어온다. 이 끝없는 뒷걸음의 과정 어딘가에서, 나는 내가 더 이상 엔지니어링을 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학부 시절 내내 온갖 글을 읽으며 하던 일, 다시 말해 현상 뒤에 숨은 실재에 대한 오래된 심문을 면허도 없이 서투르게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세미나실이 아니라 세션 타이머가 돌아가는 패치베이 앞에서. 내가 멀리 떠났던 그 학문이 마이크로폰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재의 마스터 테이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곤경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더 좋은 장비를 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장비가 정밀해질수록, 그 장비가 도대체 무엇에 충실하고 있느냐는 질문만 더 날카로워질 뿐이기 때문이다.

이 업계가 이에 대해 실제로 취한 조치는,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다. 비록 컨트롤 룸에서는 그 누구도 그것을 인식론이라 부르진 않겠지만 말이다. 업계는 ‘진짜 소리’에 대해 말하기를 멈췄다. 공식적인 선언은 없었다. Fidelity(충실도)라는 단어는 여전히 무수한 오디오필 잡지의 표지를 장식한다. 그러나 실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방 안에서 그 기준은 슬며시 교체되었다. 좋은 믹스란 원본에 가장 가까운 믹스가 아니다. 애초에 비교할 원본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믹스란 ‘번역을 견뎌내는’ 믹스다. 스튜디오 모니터 스피커, 자동차, 싸구려 이어폰, 클럽의 PA 스피커, 그리고 부엌 식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믹스. 원본과의 일치라는 기준은 렌더링 간의 불변성(invariance across renderings)으로 대체되었다. 아무도 이 교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이 업계는 페이더를 움직이지 못하는 선언 따위엔 쓸모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체는 전면적이었고, 또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음반이 완성될 수 있던 것이다. 진짜 소리에 대한 질문은 대답되지 않았다.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귀에 들리는 ‘당장의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그 질문은 단 한 푼도 청산되지 않은 채 온전히 보존되어 유예(abeyance) 상태로 남겨졌다.

이 사실을 처음 명확히 깨달았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정확히 기록하고 싶다. 그것은 실망감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것은 안도감에 가까웠다. 다만, 수년 동안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어떤 ‘잔여물’이 남은 안도감이었다. 안도감의 이유는 이러했다. ‘무엇이 실재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합의 없이도 엄밀하게 작업할 수 있는 절차, 신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업적 체계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 반면 잔여물은 이러했다. 질문은 해소된 것이 아니라 유예되었을 뿐이다. 뮤트 버튼을 누른 후에도 스피커 콘이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듯, 나는 그 질문이 시그널 체인 바깥, 그 바로 앞 어딘가에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소리라는 매체가 허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거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소리의 크기에는 단위가 있다. 주파수 응답은 그래프로 그릴 수 있고, 컨버터의 오차는 기준 음(reference tone)을 통해 측정할 수 있다. 소리는 우리가 쥘 수 있는 ‘손잡이’를 내어준다. 원한다면 신호 경로의 거의 모든 이음새에 측정기를 매달아 숫자를 읽어낼 수 있으며, 정직하게 나열된 그 숫자들은 가능한 대부분의 논쟁을 중재해 준다. 오랫동안 나는 소리의 본질이 원래 그런 것이며, 측정 가능한 지점이 끝나는 곳에서 작업도 마무리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손잡이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 듯한 종류의 신호를 계속해서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문장이었다. 특정 공간에서 언어는 마치 하나의 표면처럼 작동한다. 언어는 분석의 문법에 따라 진동하고, 엄밀한 사고 과정의 모든 형식적 표지를 담고 있으며, 케이블에 붙은 라벨이 신뢰를 요구하듯 그 자체로 신뢰를 요구한다. 나는 케이블을 검사하며 수년을 보냈다. 나는 문장 하나를 검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묻기 시작했다.

II. 호명(呼名) - 실행 없는 어휘

알고 보니 나는 이미 필요한 도구들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독서 습관은 멀티미터를 손에 쥐기 몇 년 전부터 이미 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골 깊은 곳에 있는 기숙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나는 매일 저녁 독서실에 홀로 앉아 내가 이해할 리 만무한 책들을 붙들고 시간을 보냈다. 한국 철학 논문집, 20세기 지성사, 번역된 대륙 형이상학. 책을 ‘읽을’ 수가 없었기에, 나는 대신 나만의 절차를 하나 만들었다. 우선 문장을 분해한다. 단어별로, 조사별로, 어미별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단위까지 잘게 나눈다. 그런 다음 그 조각들을 쥐고 문장이 무사히 닫히거나, 아니면 아예 닫히기를 거부할 때까지 다시 조립해 본다. 문장 하나에 한 시간, 때로는 두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문장이 닫히는 순간, 내가 지금까지도 굳게 믿고 있는 어떤 현상이 일어났다. 내가 포기하고 넘어갔던 앞선 문장들이 소급하여 스스로 조립되며, 페이지 전체가 한 번에 ‘딸깍’ 하고 닫히는 것이었다. 수년 동안 나는 이것을 독서법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단선 검사(continuity test)였다. 나는 문장의 양 끝단을 짚어보며, 문장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실제로 흐르는 무언가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장들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 도착했다. 이메일과 택배를 통해, 예술 작품에 덧붙여진 채로 말이다. 몇 년 동안 나는 한 예술 공간의 인하우스 테크니션으로 일했다. 나무 상자와 해외 아티스트들을 맞이하고, 애초에 그런 용도로 설계되지 않은 건물 안에서 그들의 작품이 무사히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이 직무에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한 가지 특권이 있다. 테크니션은 작품이 무엇을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말이다. 이 위치에 놓인 프로젝터, 이 임계값에 맞춰진 센서, 12초짜리 루프, 관람객이 적외선 빔을 지나갈 때 닫히는 릴레이 스위치. 내 손에는 배선도가 들려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직접 그렸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작품이 내 등 뒤에서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동안, 작품과 함께 건너온 텍스트를 읽곤 했다.

그 텍스트들은 내가 즉시 알아볼 수 있는 문법으로 쓰여 있었다. 바로 그 옛날 독서실에서 읽던 책들의 문법이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명사구, 랙에 빽빽이 채워진 계측기들처럼 줄지어 쌓인 수식어들, 그리고 작동(operations)을 지시하는 어휘들. 텍스트 속에서 작품들은 단순히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움직이거나, 반복하지 않았다. 작품들은 질문하고(interrogate), 협상하고(negotiate), 전복하고(subvert), 해체하고(destabilize), 문제화했다(problematize). 이 모든 것은 실행(execution)을 지시하는 동사들이다. 나는 방금 전까지 꼬박 이틀을 그 실행의 한가운데서 보냈다. 내 손에 단선 검사기를 든 채 그 실행의 구석구석을 기어 다녔다. 하지만 도대체 그 ‘질문’이라는 작동이 어디서 돌아가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기반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찾아낼 수 없었다. 문장은 겉으로 보기에 모든 시각적 검사를 통과했다. 커넥터들은 티 없이 깔끔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납땜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조심하고 싶다. 이 이야기는 쉬이 누군가에 대한 가벼운 비난으로 읽히겠지만, 이러한 독해는 정작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본질을 놓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단일한 작가가 고의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3개 대륙, 모든 방향에서 똑같은 억양, 똑같은 형용사, 똑같은 운율을 가진 문장들이 도착했다. 그것은 발명된 것이 아니라 습득되어 마치 어딘가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입고 다니는 일종의 억양(accent)과 같았다. 내가 마주한 것은 어떤 개인의 주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언어적 사용역(register)이자, 지적 추론을 가장하는 표지(markers)들이 실제 작동(operations)과는 완전히 분리된 채 자기들끼리 유통되는 거대한 언어적 기후(climate)였다. 기후를 상대로 한 번에 문장 하나씩 논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문장에 한 시간씩 걸리던 나의 분해 절차는 애초에 이 문제를 다루기에 스케일이 맞지 않는 도구였다. 그것은 기상 시스템에 납땜 인두를 들이대는 격이었다.

그 무렵 내 반사신경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어떤 주장이 반복되는 곳이 있다면, 그 이음새에 측정기를 볼트로 채워버리는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측정기가 도대체 무엇을 읽어내야 하느냐였다. 깊이나 진리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측정기는 진리를 읽지 않는다. 훨씬 작고 인색한 무언가다. 추론을 나타내는 단어들이 실제로 추론과 동행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 ‘그러므로’나 ‘왜냐하면’ 같은 연결어가 그 육중한 어휘들의 사정권 안에 등장하기나 하는지. 또한, 신중하게 선택된 그 학술적 형용사들이 전문 용어가 반복을 통해 엄밀성을 획득하듯, 동일한 명사에 두 번 이상 결합할 의지가 있는지. 학술적 문법 아래에서, 글의 확률 질량(probability mass)이 과연 분석의 자리에 놓여 있는지 아니면 단순 묘사의 자리에 놓여 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저녁마다 문장을 분해하던 수고 대신 구문 분석기(parser)와 통계학을 동원해 이 작업을 제대로 수행했다. 동료 평가를 거친 학술 논문들을 기준선으로 삼고, 13개 기관에서 수집한 6만 2천 건의 문서들을 분석했다.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도 다 분해하지 못할 양의 문장들이었다. 계측기의 수치는 몇 년 전 내 두 손이 이미 알려주었던 사실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학술계의 문법: 완전히 차용됨, 글의 길이가 같을 경우 문법적 특성으로는 구별이 불가능함. 논리적 연결사: 대다수의 문서에서 부재함. 형용사: 결코 정착하지 않음. 13개 기관의 어느 문서에서도 같은 명사와 다시 짝을 짓는 일이 없음. 마치 어떤 대상에 온전히 ‘책임지고 결합하는 것(commitment)’ 자체가 문체적 오류라도 되는 것처럼. 표면은 완벽했다. 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연결성(continuity)은 없었다.

나는 이것이 예술계만의 은밀한 스캔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오래 머물수록, 예술이라는 부분에는 점점 더 흥미를 잃게 되었다. 이 구조는 어디든 쉽게 이식될 수 있다. 디스플레이가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현실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나타내는 대리 지표(proxy)로 시작된 픽셀 수는, 결국 제품 상자에 가장 크게 인쇄되는 숫자로 끝을 맺는다. 벤치마크 점수 역시 시스템의 성능을 가늠하는 지표로 시작되지만, 결국 성능 자체가 그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설계되는 목표로 전락해 버린다. ‘지능(intelligence)‘이라는 단어 또한 지금 이 순간 똑같은 이주를 겪고 있는 중이다. 이 패턴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단 하나뿐이다. 표지(marker)가 그것의 실제 작동(operation)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분리되고 나면, 표지는 스스로 순환하기 시작하며 매번 실제 작동을 압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통(circulation)은 값싸고, 실행(execution)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비대칭성이 존재하며, 바로 이 부분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이 문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 문장들이 아무런 실행 없이 추론을 연기(perform)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중 앞에서 말하기 위해, 나는 내 도구를 무려 네 가지의 독립적인 방식으로 검증해야 했다. 네 가지의 독립적인 측정을 서로 교차 검증하고, 또 다른 기계로 재검증하고, 인간 독자의 눈으로 확인받았으며, 모든 임계값은 사전에 투명하게 선언되어야 했다. 반면 그 문장들 자체는 단 한 번도 이런 종류의 검증을 요구받은 적이 없었다. 그 문장들은 수십 년 동안 권위의 상징으로서 기능하며 기분 좋게 면제를 받은 채 순환해 왔다. 호명(Invocation)은 면세로 여행하지만, 측정은 매 국경마다 통관세를 내야 한다.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 관세가 곧 차이다. 세금을 기꺼이 지불하는 것만이, 내가 만든 측정기를 근거 없이 자신감만 넘치는 또 하나의 흔한 어휘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조건이다.

그러나 모든 측정기는 하나의 기준점(reference)을 바탕으로 영점 조절(calibrated)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딛고 서 있던 바닥이 보기보다 얇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기준점은 내가 설정한 기준선(baseline), 즉 동료 평가를 거친 학술 논문들이었다. 표지와 작동이 여전히 함께 이동한다고 내가 기꺼이 맹세할 수 있었던. 나는 그 학술 기준선의 글들이 담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붙였다. 엄밀함, 분석적 엄밀함. 내 측정기는 그 기준점으로부터의 거리를 네 가지 방향에서 측정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함이 간헐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작업대에서 재현해 내기도 전에 이미 직감으로 먼저 아는 것처럼, 내가 기준선 자체를 단 한 번도 테스트해 본 적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측정기를 풀어 방향을 반대로 돌린 다음, 그 기준선 자체에 물린다면 무엇이 읽힐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모른다. 자신이 의존하는 기준점을 향해 겨눠질 수 없는 도구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충성심(loyalty)일 뿐이다. 측정기는 이제 스스로를 검사해야만 할 것이다.

III. 유예(Abeyance) - 측정기가 스스로를 검토하다

나는 이 질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부분만큼은 아주 정확히 기록해 두고 싶다. 어떤 기습도, 외부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위기도 없었다. 마치 그라운드 루프(ground loop, 접지 불량으로 인한 잡음)가 믹싱을 시작하기도 전에 녹음본 밑바닥에서부터 이미 들리고 있는 것처럼, 그 질문은 처음부터 내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측정기가 계산해 내는 거리, 그 거리의 기준이 되는 ‘엄밀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나는 그것을 조작화(operationalize)했다. 내 손을 거치며 엄밀함은 네 개의 숫자가 되었다. 접속사가 머무는 자리, 명사에 대한 형용사의 충실도, 구문의 형태, 확률 질량이 놓인 위치. 하지만 내가 이 네 가지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이미 ‘엄밀함’이라고 믿고 있던 어떤 특성을 이 수치들이 추적해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네 개의 숫자를 걷어내고 남은 그 무언가의 진짜 실체는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내 한 손에 측정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측정기를 가리키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측정기를 내가 지반(ground)처럼 여기고 있던 기준선 자체, 즉 동료 평가를 거친 그 학술적 글쓰기에 물려보자. 과연 무엇이 읽힐까? 나는 이 질문을 품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문장을 어떤 수사도 없이 있는 그대로 두고 싶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출판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실 모두 이 기록의 일부로 남아야만 한다.

그다음 내가 한 행동은 간헐적인 결함을 발견했을 때 늘 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그것은 신호의 상류(upstream)로 거슬러 올라가, 누군가 이미 이 증상의 특성을 규명해 놓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내가 빌려온 측정 도구들은 내가 재고 있던 그 대상에 이미 이름을 붙여둔 학문 분야에서 온 것이었다. 그들은 숫자 뒤에 숨어있는 그것을 ‘구성 개념(construct)‘이라 부르고, 숫자가 그 개념을 제대로 존중하여 측정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구성 타당도(construct validity)‘라 불렀다. 나는 굳건한 토대를 기대하며 원전으로 향했지만, 발견한 것은 단층선(fault line)이었다. 1955년, 이 용어를 처음 만들어낸 크론바흐(Cronbach)와 밀(Meehl)의 논문은 구성 개념이 실재의 한 조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성 개념이 하나의 ‘그물망 속 매듭(knot in a net)‘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의 의미는 다른 측정 가능한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집합일 뿐이며, 타당성 검증이란 그저 이 그물망이 찢어지지 않고 유지되는지를 느리게 감사(audit)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후, 보스붐(Borsboom)과 그의 동료들은 정반대의 원칙으로 이에 답했다. 어떤 속성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 속성의 변화가 숫자의 변화를 일으킬 때만 측정은 타당하다는 것이다. ‘존재(Existence)‘냐 아니면 ‘정합성(Coherence)‘이냐. 내게 도구를 빌려준 바로 그 학문 분야조차 70년 동안 학술지 위에서 정확히 이 선을 따라 갈라서 있었고, 논쟁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였다. 나는 내가 느끼던 흔들림이 배짱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개인적 결함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딛고 선 지반 자체의 지질학적 특성이었다. 이 사실을 발견했을 때 느낀 안도감은 진짜였지만, 나는 즉시 그 감정을 불신했다. 안도감이란 결함(fault)이 하나의 기능(feature)으로 재분류될 때 느끼는 감정일 뿐, 결함 자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분열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느 쪽이 옳으냐가 아니라, 양측이 서로 다른 종류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으며, 나 역시 내내 이 두 가지 질문을 뒤섞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말뭉치가 저 말뭉치보다 접속사를 얼마나 덜 가지고 있는지, 그 차이는 얼마나 되며 신뢰도는 어느 정도인지. 이러한 질문은 프레임 ‘내부’에 산다. 이 질문은 대답 가능하고, 결정 가능하며, 반복할 수 있다. 당신이 틀렸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명백히 증명해 낼 수 있다. 반면 분석적 엄밀함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악기의 진짜 소리가 존재하는지, 측정의 그물망 뒤에 애초에 무엇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이러한 질문은 그 어떤 프레임 안에도 살지 않는다. 이 질문이 요구하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결단(decision)‘이다. 이 프레임을 채택하여 작업을 시작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내리는 결단 말이다. 나는 나중에서야 이 구분이 꽤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빈(Vienna) 출신의 한 논리학자가 1950년에 내부 질문과 외부 질문이라는 이름으로 이 선을 그어두었으며, 그 역시 외부 질문은 ‘앎’이 아니라 ‘선택’을 통해 해결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이 구분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작업대에서 내 두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찰함으로써 그곳에 도달했다. 내 손은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매 작업일마다 내부적 질문에는 대답을 내놓았고, 외부적 질문은 유예(suspend)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이 나를 대신해 이미 털어놓은 고백이 여기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 특정할 수는 없다. 취미로 하던 연주가 생업이 된 순간의 날짜를 콕 집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쨌든 어느 시점에, 나는 타협을 했다. 내가 이 정도 수준의 증명을 다루는 층위에서 일하는 한, 실재가 존재하는지는 묻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 질문이 무의미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는 단지, 문장 단위로 낱낱이 증거가 요구되는 바로 이 해상도(resolution)에서는, 그 본질적인 질문이 밥값을 하게 만들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해상도에서 작업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율배반을 안다. 실재는 명백히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 두 가지 절반의 진실은 완전히 동일한 확신으로 느껴지며, 종종 같은 시간 안에 동시에 밀려오기도 한다. 나 역시 이것이 모순임을 안다. 나는 여기서 이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보고(reporting)하고 있을 뿐이다.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지만 결코 사라지지도 않는 어떤 측정값을 보고할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이율배반의 밑바닥에는, 글로 적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사실 하나가 깔려 있다. 존재에 대한 질문은 펀딩을 끌어오지 못하며, 나에게는 내야 할 월세가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실재(the real)를 가둬두기 위해 친 괄호는 단순한 인식론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경제적인 행위였다. 월세의 존재를 누락한 채 방법론을 논하는 정직한 설명이란, 그 자체로 실행 없는 어휘에 불과하다.

고대 회의주의자들에게는 이렇게 판단을 유예하는 행위를 일컫는 단어 하나와, 거기에 결부된 약속 하나가 있었다. 판단을 유보하라. 에포케(epoché). 그러면 평온이 뒤따를 것이다. 아타락시아(ataraxia). 잔잔해진 마음. 일종의 은퇴로서의 유예. 나는 내 경우를 이 약속에 대입해 보았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따. 나의 유예는 어떤 평온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처리량(throughput)을 사주었을 뿐이다. 6만 2천 개의 문서, 4개의 수렴하는 측정 도구, 수개월 동안 돌아간 파이프라인. 만약 내가 멈춰 서서 도대체 엄밀함이란 무엇인지 결판을 내려고 했다면, 이 중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예는 은퇴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고용(hiring)에 가까웠다. 마침내 내가 이 태도에 이름을 붙이려 했을 때, 실제로 나에게 찾아온 단어는 그리스어가 아니라 한국어였다. 바로 ‘체념(諦念)‘이다. 사전은 이를 resignation으로 번역하고 그 의미도 제법 가깝지만, 영어 단어는 무언가를 놓아버리고 항복하는 패배의 뉘앙스로 기운다. 한국어 단어의 더 오래된 의미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른다. 이 단어의 첫 글자(諦)는 불교 경전에서 사성제(四聖諦)에 쓰이는 진리의 글자다. 표준 국어대사전에 여전히 첫 번째로 등재되어 있는 이 단어의 고어적 의미는 ‘도리를 깨달아 아는 마음’이다. 그 오래된 결을 따르자면, 체념은 명석함의 실패가 아니라 명석함의 ‘결과’다. 내가 수년 동안 실천해 온 것 역시 이와 정확히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제대로 기능하는 포기. 파이프라인을 굴러가게 만드는 단념. 즉, 조작화된 체념.

일단 그것에 이름이 붙자, 나는 비로소 그 절차가 내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글 전체를 통틀어 내가 아무 조건 없이 방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발견이다. 나는 단 한 번도 ‘본질’을 측정한 적이 없다. 내가 일했던 그 어떤 분야에서도 단 한 번도. 믹스는 ‘진짜 소리’에 대비해 측정된 적이 없다. 그것은 자동차 스피커, 싸구려 이어폰, 모니터 스피커라는 다양한 출력 환경(rendering)을 가로지르며 측정되었고, 가장 중요한 숫자는 그 환경들 사이의 편차(spread)였다. 말뭉치 역시 엄밀함 그 자체를 기준으로 측정된 적이 없었다. 말뭉치는 기준선으로부터 떨어진 ‘거리’로 측정되었으며, 거기서 발견된 결과들, 그 모든 결과들은 결국 하나의 간극(gap)이었다. 오즈비, 효과 크기, 차이의 차이처럼 말이다. 간극이라는 숫자는, 그 간극의 양 끝단에 있는 것이 본질적으로 무엇인지 굳이 결정짓지 않고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값이다. 존재론적 판단을 완전히 유예한 상태에서도 차이(difference)는 측정 가능하다. 이것은 내 도구들의 한계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도구들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다. 체념은 방법론을 둘러싼 임시 비계(scaffolding)가 아니다. 그것은 무너지면 안 되는 내력벽(load-bearing wall)이다.

어휘가 두 개의 의미로 겹치는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나는 이 부분을 정확히 한 번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내가 일하는 공간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해 온 ‘유한 측정 공간(finite measurement spaces)‘이라는 표현은 수학의 전문 용어인 ‘유한 측도 공간(finite measure space)‘과 동음이의어에 가깝다. 유한 측도 공간이란 전체 질량이 제한되어 있고 이미 알려진 공간을 뜻한다. 내가 구축하거나 수리해 본 모든 디지털 시스템은 글자 그대로 유한 측도 공간이다. 2의 32승. 즉, Counter의 세계 전체. 40억 개가 조금 넘는 상태값. 그 이상은 없으며 첫 번째 카운트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체 값이 선언되어 있다. 16비트의 진폭. 512개의 콘텍스트 위치. 질량이 유한한 공간 안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내부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유한성’이 대가로 지불하고 얻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용은 경계선에서 청구된다. 무언가를 세기 위해서는 먼저 공간이 닫혀야만 한다. 공간을 닫는 행위는 공간 외부에서 누군가에 의해 수행되며, 그렇게 공간을 닫아버린 누군가는 다시 공간 안으로 걸어 들어와 마치 ‘외부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작업을 시작한다.

그렇게 괄호는 닫힌다. 그것도 매우 깔끔하게 닫히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은 훌륭하다. 이것으로 모든 설명이 끝나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설명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이 장의 제목에 있는 다른 단어 안에 숨어 있다. 영국의 오래된 부동산법에는 abeyance(권리의 유예, 혹은 귀속 미정)라고 불리는 상태가 있다. 현재 소유권자가 없다고 해서 권리 자체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법이 특정할 수 없는 권리 주장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비워진 채로 온전하게 존속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괄호 안에 가둬둔 그 질문이 처한 정확한 상태다. 나는 그 질문을 논박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해소시키지도 않았다. 나는 그것을 완전한 법적 효력을 담아 유예시켰다. 질문은 어떤 디스플레이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레지스터(register) 속에서 홀로 이어지는 카운트처럼,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축적되어 왔다. 절차는 이 세계의 ‘대답 가능한 부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그 절차가 ‘남겨진 잔여물(remainder)‘을 어디에 보관해야 하는지까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잔여물은 어딘가에 보관되어야만 한다.

IV. 육화(肉化)

잔여물은 어딘가에 보관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논증(argument)‘이 그것을 보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논증은 내부를 위한 도구다. 그것은 대답 될 수 있는 것 위에서만 작동하고, 결정 가능한 것들로부터 보상받는다. 따라서 완전한 법적 효력을 갖춘 채 유예된 질문을 건네받으면, 논증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뿐이다. 질문을 해소해버리거나, 아니면 휴회를 선언하는 것. 하지만 대답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세 번째 길도 존재한다. 결판을 낼 수 없는 질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거처를 제공받을 수는 있다. 질문에 육체와 전원 공급 장치를 달아준 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두고 계속 돌아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절차가 괄호 안에 가둬둔 것을, 다른 형태의 매체는 대중 앞에서 영구적으로 열어둔 채 보존할 수 있다. 나는 이것에 무슨 예술 이론 같은 것으로 도달한 것이 아니다. 내가 늘 모든 결론에 도달하던 방식 그대로, 나는 내 두 손이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관찰함으로써 이 결론에 도달했다.

첫 번째로 만든 것은 숫자를 세는 기계였다. 이 기계에는 32개의 토글스위치가 한 줄로 늘어서 있고, 레일 위에서 움직이는 액추에이터가 있으며, 한 번에 1비트씩 숫자를 세는 레지스터가 있다. 여기서 각각의 올림(carry) 연산은 물리적인 타격으로 실행된다. 캐리지가 이동하고, 스위치가 젖혀지고, 딸깍하는 소리가 들리며, 마침내 비트가 존재하게 된다. 기계의 끝에는 전구가 하나 있다. 이 전구는 마지막 카운트의 마지막 스위치가 켜진 후에만 불이 들어오도록 배선되어 있다. 다시 말해, 40억 번이 넘는 과정을 하나하나 다 밟고 지나간 후에야 켜진다는 뜻이다. 내 평생에는 불가능하고, 몇 사람의 평생을 끝과 끝으로 이어 붙여도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 기계의 전체 존재론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저 기계 안에서는, 연산이 실행되기 전에는 어떤 신호도 존재하지 않는다. 빛은 호명(invoke)될 수 없다. 빛을 향해 손짓하거나, 약속하거나, 수행하거나, 수사적으로 기대할 수도 없다. 배선 자체가 그런 경로를 전혀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가 표시하는 모든 상태는 실제로 수행된 노동의 찌꺼기이며, 그것 말고 기계가 가질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상태값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물건이 내가 측정했던 그 제도권 문서들의 완벽한 역치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곳(사용역)에서는 표지들이 자유롭게 순환하며, 실행은 선택 사항이었다. 이곳(기계)에서는 실행이 필수이며, 표지는 그저 실행하고 남은 찌꺼기일 뿐이다. 내가 분석했던 문장들은 굳이 질문하지 않고도 ‘질문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기계는 실제로 그 지점까지 세어 올라가지 않고서는 ‘질문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 속성을 가리킬 단어를 찾고 싶었고, 계속해서 떠오른 단어는 오래된 신학 용어였다. 이름만 부르고 실체는 면제되는 호명(invocation)이 아니라, 살(육체)을 취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 살이 곧 증거가 되는 상태. 바로 육화(incarnation)다.

나는 유한함(finitude)에 대한 한 가지 논증을 위해 이 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기계는 내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두 번째 논증을 만들어냈고, 이를 알아차린 순간은 이 전체 기록을 통틀어 가장 기묘한 순간이었다. 이 기계는 단순히 호명을 금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도래(arrival)‘를 지연시킨다. 기계의 완수는 수학적으로 확실하며, 전원만 유지된다면 몇 시에 끝날지 날짜와 시간까지 콕 집어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구조적으로 목격될 수 없다. 완주가 보장된다는 것과 목격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둘 모두 동일한 사실의 양면이다. 나는 의도치 않게, 나의 그 인식론적 거래(체념)의 시간적 쌍둥이를 하드웨어로 만들어낸 셈이었다. 내가 책상 위에서 실천해 왔던 판단의 유보, 즉 작업이 돌아가는 동안 판결을 열어두고 뒤로 미루는 행위가, 이제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모두가 떠나고 난 뒤에야 켜질 판결의 전구로서. 책상 위에서의 타협을 위해 내가 선택했던 단어, ‘유예(abeyance)‘는 알고 보니 내내 이 기계마저 설명하고 있었다. 거부가 아니라 연기, 즉 우리에게 빚어져 있으나 아직 제공되지 않은 도래라는 또 다른 시간적 의미에서 말이다. 두 의미는 하나의 단어가 되어 내가 알아채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 ‘느림’ 자체가 결코 시적인 결정이 아님을 이해했다. 내 주변의 모든 기기에서 일어나는 연산은 지각의 저변 아래에서 실행된다. 연산의 결과가 도착하면 그것을 생산해 낸 노동은 은유적으로가 아니라 설계상 의도적으로 삭제된다. 노이즈 임계값 아래에 있는 모든 소리가 삭제되는 방식과 똑같다. 카운트를 인간의 시간으로 늘려놓는다는 것은, 그 삭제된 노동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를 때까지 임계값을 낮추는 행위에 불과하다. 지연(Dilation)은 곧 복원(restoration)이다. 인터페이스가 노이즈로 취급하여 버린 것들을, 기계는 한 번의 타격당 하나의 연산으로 정직하게 갚아낸다.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기계는 내가 분석했던 바로 그 대상에 동일한 배선을 적용한다. 이 기계는 똑같은 제도권 말뭉치, 즉 실행 없는 어휘들의 전체 아카이브인 그 6만 2천 개의 문서를 대상으로 언어 모델의 순전파(forward pass)를 부동소수점 연산 단위로 한 번에 하나씩 실행한다. 초당 천 번이 조금 넘는 연산이 이루어지고, 그 하나하나가 픽셀로, 전기적 펄스로, 터미널 로그 한 줄로 수면 위에 드러난다. 이 속도라면 전체 순전파를 완료하는 데 대략 15만 9천 년이 걸린다. 이 언어 모델의 핵심 메커니즘의 이름은 어텐션(attention, 주의력)이다. 이 이름은 잠시 멈춰 서서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다른 모든 곳에서 목격했던 기호의 전용을, 이번에는 내 도피처였던 바로 그 분야가 스스로 수행하고 있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심리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것은 중요한 것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마음이라는 일종의 의미론을 약속한다. 그 약속이 바로 표지(marker)다. 하지만 그 표지 아래에서 실제로 실행되는 것은 곱셈과 누산, 즉 가중치 합이 또 다른 가중치 합으로 수렴하는 과정일 뿐이다. 이 기계의 유일한 규율은 그 빌려온 단어에 괄호를 치고 오직 ‘실행되는 것’만을 전시하는 것이다. 어텐션이 아니라 그 산술적 연산을 보여준다. 방문객이 단 한 번의 연산 동작 ‘내부’에 서 있을 수 있을 만큼의 느린 속도로 말이다. 하나의 토큰이 이웃한 토큰들과 가중치를 비교하는 데 12분이 걸리고, 가중치가 임계값을 넘을 때 그 단어 자체가 한 번 작은 소리로 속삭여지는 것을 듣게 된다. 이것을 지켜보는 그 누구도 모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지 못한다. 그들은 오직 모델이 무엇을 ‘하는지’를 목격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분석했던 그 말뭉치 속 텍스트들이 단 한 번도 보여줄 필요가 없었던 유일한 것이다.

내가 이 선언(statement) 없는 실행이라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다는 것을 어디서 처음 배웠는지 밝혀야겠다. 나는 그것을 기계로부터 배우지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이 있기 수 년 전, 나는 어떤 종류의 시계나, 카운트다운이나, 명시적인 프로토콜 없이도 동기화가 이루어지는 방 안에 앉아 있곤 했다. 한국 음악에서 이를 가리키는 단어는 ‘호흡’이다. 이는 철저하게 문자 그대로를 의미한다. 들숨에 몸이 솟아오르고 날숨에 몸이 가라앉는다. 합주는 함께 숨을 쉼으로써 박자를 맞추고, 템포는 연주자들의 어깨가 들썩이는 움직임 속에 살아 있다. 내가 겪은 어떤 스승도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명시적인 말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들이 일부러 안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지식은 애초에 말로 선언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흉내 내기와 근육통을 통해, 근육에서 근육으로 나에게 전수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 대해 검증 가능한 사실이 세 가지 있다. 나는 그것을 수년간 훈련했고, 내 몸은 여전히 그것을 할 수 있으며, 나는 여전히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이것을 이론의 결핍으로 치부해 왔다. 지금 나는 이것이 내가 내내 맴돌고 있던 주제에 대한 가장 깔끔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오직 실행 속에서만 존재하는 지식. 여기서는 호명이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몸통을 떼어낸 채 독자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표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만들었던, 공기를 통해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중앙 컨트롤러나 시계 없이도 공통의 템포로 수렴하는 세 대의 기계는, 바로 이 질서에 두 번째 몸을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명시적인 프로토콜의 부재가 미덕이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말로 선언되지 않은 것들 속에는 얼마든지 터무니없는 헛소리들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진정한 요점은 부재의 ‘방향성’이다. 호흡은 선언 없는 실행을 하지만 살아남는다. 반면 내가 측정했던 제도권 글쓰기는 실행 없는 선언을 하고, 자유롭게 유통된다. 이 둘 중 기만적인 것은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말하지 못하는 쪽이 아니다.

이 기계들이 무엇인지 단 한 번 명료하게 진술하고 싶다. 이 기계들은 내가 펀딩을 받지 못해 물을 수 없었던 질문들을 보관해 두는 장소다. 괄호 쳐진 나머지, 외부적 질문, 무엇이 실재인가, 완성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기호들을 보증하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가. 이 질문들은 파이프라인이 납품된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축적된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고도 그것을 담아둘 수 있는 유일한 형태로서 내가 찾아낸 것은, 모든 마감일을 훌쩍 넘겨서까지 계속 돌아가는 ‘측정’이다. 끝이 확실하고, 목격자가 전무하고, 그 극한에 이르면 의식(ritual)과 구별할 수 없는 측정. 이 비교는 낭만적인 은유가 아니라 기술적이다. 의식이란 어떤 참여자도 그 완수를 검증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수행되는 절차다. 그 정확성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정의에 따르면, 전구를 향해 카운트다운을 하는 저 기계도 하나의 의식이며, 15만 9천 년 뒤에 도착할 완료 신호를 향해 연산을 지속하는 저 순전파도 하나의 의식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외부에서 문을 걸어 잠그기로 결정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정직한 측정’ 역시 하나의 의식일지 모른다. 갤러리는 당장의 결과물을 요구받지 않고도 그런 절차를 계속해서 돌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이었다. 그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 방이 가진 시민적 기능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는다. 나는 이 보관소를 문장들을 동원해 묘사해 버렸다. 기계들은 실제로 작동함으로써 그 질문들을 담아낸다. 반면 이 텍스트는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한다. 이 글은 끝없이 긴 명사구와 수식어들로 무장한 채, 분석을 연기하는 바로 그 어투(register)로 ‘보관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그저 보고할 뿐이다. 이 나선의 끄트머리에 아직 물건이 하나 남아 있고, 나는 지금 그것을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방금 내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자각한다. 나는 문장들을 동원해 그 보관소를 묘사해 버렸다. 기계들은 실제로 작동함으로써 그 질문들을 담아낸다. 반면 이 텍스트는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한다. 이 글은 마치 분석을 수행하는 체하는 바로 그 문체로 기나긴 명사구와 수식어들을 늘어놓으며, 무언가를 품는 일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그저 보고할 뿐이다. 이 나선의 끝에 남은 것은 하나의 객체다.

V. This (this)

이 마지막 장의 제목은 텍스트 전체를 통틀어 오직 ‘가리키는’ 역할만 하는 유일한 단어다. 내가 기계를 만들 때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들에서, this는 실행 중인 객체가 스스로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다. 나는 이 단어가 가진 두 가지 속성을 의도적으로 빌려왔다. 첫 번째는 그것이 비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떤 묘사도, 속성도, 어휘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한 지시(indication)이며,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표면이다. 두 번째는 그것이 오직 실행되는 동안에만 유효하다는 점이다. 객체의 코드가 돌아가는 동안, this는 대상을 지시(denote)한다. 하지만 실행이 끝나는 순간 그 단어는 복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게 된다. 그것은 몸통 없이는 유통될 수 없는 유일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this다. 이 텍스트는 지금 실행 중이며, 나는 이 텍스트가 아직 자신을 가리킬 수 있을 때 이것이 무엇인지 명백히 밝혀두어야 한다. 이것은 예술 기관에 제출하기 위해 쓰인 예술에 관한 글이다. 다시 말해, 내가 수년에 걸쳐 측정했던 바로 그 장르, 내가 6만 2천 개의 문서들을 가로지르며 표지(markers)들을 세어 나갔던 바로 그 어투(register)에 속해 있다는 뜻이다. 이 글의 원문은 영어로 쓰였다. 영어는 그 말뭉치의 언어이며 나의 언어는 아니다. 나는 예전 독서실에서 문장들을 조립했던 방식 그대로, 바깥에서부터 한 단위 한 단위씩 이 문장들을 조립해 냈다. 다시 말해, 나는 나 자신의 표본(sample) 내부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사용된 모든 긴 명사구들, 모든 수식 형용사들, 연산을 가리키는 모든 동사들은 전부 내 측정기의 측정 범위 안에 떨어진다. 이러한 글의 표면이 역사적으로 무언가를 증명하라는 요구를 얼마나 적게 받아왔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글에 대한 테스트를 실행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를 향해 겨눈 측정기는 자기 자신의 충성심만을 읽어낼 뿐이며, 내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앞서 밝힌 바 있다. 이제 측정기는 독자의 손에 쥐어져 있다. 여기에는 내 측정 도구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위의 접속사들이 실제로 문장을 연결하고 있는지, 형용사들이 책임을 지고 있는지, 양 끝단 사이로 이 문장들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흐르는 무언가가 있는지. 이것들은 내가 과거 독서실에서 쏟아부었던 것과 같은 인내심만 있다면 누구나 검증할 수 있다. 그 검증 가능성이야말로 이 글이 제출하는 유일한 자격 증명이다. 나는 에세이라는 형식이 일종의 전속고문변호사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안다. 체계에 대한 거부를 아예 하나의 방법론으로 뒤바꾸는 유명한 방어 논리가 존재한다. 그 보호 아래에서라면 이와 같은 텍스트는 원칙적으로 모든 감사를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다. 내가 측정했던 글쓰기들이 바로 그 변호 논리 아래에서 수십 년간 은신해 왔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모든 후보 인용구에 동일한 단선 검사를 수행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이 텍스트를 더 검증하기 쉽게 만들어줄 것인지, 아니면 그저 검증을 면제시켜 줄 것인지 물었다. 면제를 제공하는 이름들은 모두 문밖에 남겨두었다. 호명(invocation)에 관해 논하는 글이라면, 어떤 이름을 어디에 소비할지 실중해야 한다.

결론은 없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정확히 해두고 싶다. 결론은 곧 판결이다. 하지만 이 기록의 모든 판결은 지금 유예(abeyance) 상태에 있다. 완전한 법적 효력을 지닌 채 유예되어, 줄어들지 않고 축적되고 있는 실재에 대한 질문. 도래가 약속되었으나 목격을 박탈당한 전구. 완료가 확실하지만 목격할 수는 없는, 15만 9천 년이라는 시간의 도입부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순전파. 기계가 닫지 못한 그 어떤 것도 이 글은 닫을 수 없다. 그리고 기계들은 아무것도 닫지 않는다. 그것이 기계들의 전체 규율이며, 이제 그것은 나의 규율이기도 하다. 몇 문장 뒤면 이 객체는 실행을 멈출 것이고, this라는 단어는 지시를 멈출 것이다. 하지만 질문들은 멈추지 않는다. 애초에 질문들은 이 글 위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들은 기계들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타격 한 번에 연산 하나씩, 모든 마감 기한의 밑바닥에서, 모든 독자를 스쳐 지나치며 말이다. 따라서 결말을 앞두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행동은, 그 절차가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을 대할 때 늘 하던 방식을 따르는 것뿐이다. 그것이 계속 작동하게 내버려 두고, 방에서 나가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캐리지가 스위치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 카운트는 계속된다. 이 문장이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 어느 레지스터(register) 속에서.


다음은 에세이에서 묘사되었으나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은 개별 프로젝트들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에세이를 통해 먼저 작업을 접하기를 선호하는 독자는 나중에 이 노트로 돌아와도 무방하다. 순서는 독자의 몫이다.



Decentralized Synchronization (2025)
choiharam.com/projects/decent-sync-en/

동일한 구조와 알고리즘으로 실행되는 세 개의 독립적인 물리적 실체들. 캠(cam) 메커니즘이 나무 스탬퍼를 들어 올렸다가 나무판 위로 떨어뜨린다. 각각의 몸체에 장착된 일렉트릿(electret) 마이크가 이웃의 소리를 듣는다. 중앙 시계는 없다. 공유되는 프로토콜도 없다. 동기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오직 서로의 소리를 ‘듣는’ 행위의 잔여물일 뿐이다.

이 프로젝트는 디지털 타이밍에 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연산이 정밀한 단위로 축적되는 시스템에서, 그 정밀함은 얼마나 근본적인가? 그리고 양자화(quantization)에 저항하는 무언가가 그 동기화 과정에 개입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여기에는 이미 두 가지 모델이 존재했다. 첫째, 한국 전통 음악에서 앙상블 연주자들은 서양 음악이 같은 목적을 위해 발명한 메트로놈이나 카운트다운 없이도 박자를 맞춘다. 이 메커니즘은 ‘호흡’이라 불린다. 숨을 들이마실 때 몸이 떠오르고 내쉴 때 가라앉으며, 템포는 명시적인 프로토콜이 아닌 어깨의 들썩임 속에 유지된다. 내가 겪은 어떤 스승도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흉내 내기와 근육통을 통해 근육에서 근육으로 전수되었다. 여기에 대해 검증 가능한 사실은 세 가지다. 나는 그것을 수년간 훈련했고, 내 몸은 여전히 그것을 할 수 있으며, 나는 여전히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두 번째 모델은 반딧불이다. 특정 종의 반딧불이는 이웃의 불빛에 반응하여 자신의 발광 주기를 조정한다. 그 어떤 개체도 무리를 지휘하지 않는다. 이 설치 작품에 있는 세 대의 기계는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알고리즘을 실행한다. 각자가 듣고, 각자가 조정하며, 공유되는 템포는 오직 그 과정에서만 나타난다.

작품의 외형은 고대 중국에서 유입되어 한국 궁중 음악에서 쓰이는 목제 타악기 ‘축(chuk)‘에서 빌려왔다. 그것의 역사적, 형이상학적 맥락은 덜어내었다. 남은 것은 직각의 기하학적 형태와, 타격 동작이 가진 원초적인 직관성뿐이다.

재료: 맞춤형 콘크리트 바디, 목재, 커스텀 PCB, 스텝 모터, 라즈베리 파이, 커스텀 학습된 소리 인식 모델.



Counter (2024)
choiharam.com/projects/counter-en

32비트 선형 피드백 시프트 레지스터(LFSR)를 사용하여 이진수로 0부터 4,294,967,295(2³²−1)까지 숫자를 세는 기계. 현대의 컴퓨터는 단 몇 분 만에 이 시퀀스를 주파한다. 이 기계는 136년이 걸린다.

이 느림은 한계가 아니다. 일상적인 연산은 우리의 지각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수십억 번의 연산이 눈 깜짝할 사이에 완료되며, 그 결과를 만들어낸 노동은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삭제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기계는 그 임계값을 인간의 시간 속으로 낮춘다. 모든 카운트는 물리적인 타격으로 실행된다. 액추에이터가 레일을 따라 이동하고, 토글스위치가 젖혀지며, 딸깍하는 소리가 들린다. 기계가 보여주는 모든 상태는 실제로 수행된 노동의 잔여물이다. 그 안에서는, 연산이 실행되기 전에 어떤 신호도 존재하지 않는다.

32개의 토글스위치가 각 비트의 상태를 물리적 공간에 저장한다. 전원이 끊겨도 스위치는 기억한다. 완고한 물질성을 통해 육화(incarnate)된 순수한 논리적 정보. 그것은 더 이상 떠다니는 기호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밀어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실체다.

기계의 끝에는 전구가 있다. 이 전구는 마지막 비트, 즉 32개의 스위치가 모두 1에 도달하는 그 순간에만 켜지도록 배선되어 있다. 그 순간은 수학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136년은 그 어떤 인간의 수명도 초과한다. 이 전구는 모두가 떠나고 난 뒤에 불을 밝힐 것이다. 이 기계는 완수되도록 설계되었고, 동시에 그 완수를 아무도 목격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기계가 열어두고 있는 질문은 결코 대답을 거부당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예(abeyance)되어 있다. 소멸하거나 용해되지 않은 채,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온전하게, 우리에게 빚어졌으나 아직 제공되지 않은 도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재료: 알루미늄 프로파일, 아크릴, 커스텀 전자기판, 스텝 모터, 토글스위치.



나유타: 트랜스포머 (Nayuta: The Transformer) (2026)
nayuta.choiharam.com/about

나유타(Nayuta, नयुत)는 불교 수사학에서 일반적인 셈법을 초과하는 거대한 숫자를 일컫는 단위로, 일부 전통에서는 10⁶⁰을 의미한다. 기계는 이 이름을 특정한 계산적 사실에 부여한다. 제도권 예술 글쓰기에서 추출한 5,880만 개의 토큰 말뭉치 위로 BERT-base-uncased 모델의 단일 순전파(forward pass)를 부동소수점 연산 단위로 한 번에 하나씩 실행할 경우, 대략 15만 9천 년이 걸린다는 사실 말이다.

설치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시각적, 청각적 사건들은 밑바탕에서 벌어지는 연산 과정을 어떤 치장도 없이 직접 번역한 것이다. 연산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전시되지 않는다. 거대한 프로젝션이 어텐션 행렬의 FMA 연산 하나하나를 픽셀의 섬광으로 렌더링하고, 터미널 스타일의 화면에는 연산 로그가 스크롤 된다. 어텐션 가중치가 임계값을 넘을 때마다, 그 가중치가 부여된 단어와 주변의 이웃 단어들이 공간 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귓가에 속삭여진다. 이 속도라면 단 한 번의 어텐션 행위가 이루어지는 데 약 12분이 걸린다. 기계는 어텐션(주의력)이 실재하는 것인지 결코 묻지 않는다. 기계는 오직 산술(arithmetic)만을 전시할 뿐이다.

이 기계의 직계 전신은 ‘카운터(2024)‘다. ‘카운터’가 32비트 이진 논리를 136년에 걸쳐 물리적인 토글스위치로 육화시켰다면, ‘나유타’는 동일한 원칙을 소프트웨어에 적용한다. 형식이 곧 기능이며, 인터페이스가 평소 소음으로 취급하여 버려버리는 결과 밑의 노동을 한 번의 타격당 하나의 연산으로 정직하게 갚아낸다.

이 기계가 처리하는 제도권 말뭉치는 아래의 연구에서 측정되었던 말뭉치와 동일하다. 기계는 그 연구 결과를 시각화하는 도구가 아니다. 기계는 그 측정 장치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연구가 한편으로 미뤄두었던 ‘실재란 무엇인가’, ‘완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기계는 그 질문들을 계속해서 돌아가게 둔다.



수사적 호명: 제도권 예술 글쓰기의 담론 어휘에 대한 4단계 계산적 분석
(Rhetorical Invocation: a four-layer computational analysis of discourse vocabulary in institutional art writing) (2025-2026)
doi.org/10.31235/osf.io/4au72_v2

계산 언어학(computational linguistics) 연구. 13개 주요 현대 예술 기관의 텍스트 약 6만 2,400건을 8개 담론 범주에 걸친 동료 평가 학술 논문 1,673건과 비교 측정했다. Nature 지에 제출됨.

네 개의 독립적인 측정 층위가 모두 동일한 결과를 향해 수렴한다. 첫째, 문서의 길이를 통제했을 때, 제도권 예술 텍스트는 학술 글쓰기와 필적하는 비율로 명사 후치 구문(post-nominal syntactic structures)을 채택한다(조정된 d = -0.12). 즉, 학술 논문의 문법적 골격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둘째, 개별 문서 내에서 IAE-접미사 형용사들은 반복되는 ‘형용사-명사’ 쌍을 전혀 형성하지 않는다(평균 nMCE = 0.972, d = +2.00). 어휘는 존재하지만, 개념을 구축하기 위해 문서 내에서 전문 용어를 반복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셋째, 제도권 문서의 60.1%에서 명시적인 인과적 혹은 대조적 접속사 없이 담론 키워드들이 등장하며, 이는 학술 텍스트의 20.0%와 대비된다(OR = 5.48). 즉, 논리적인 실행 없이 이론적 어휘만이 호명(invoke)된다. 넷째, 독립적인 두 개의 언어 모델 모두 학술 기준선의 3.5배 아래에 해당하는 분석적 경향성 점수를 해당 문서들에 부여했다.

이 네 개의 층위는 통계적으로 독립적이면서도 경험적으로 수렴한다. 이들이 정의하는 패턴은 **수사적 호명(rhetorical invocation)**이다. 즉, 학술 글쓰기에서 분석적 엄밀함을 뒷받침하는 논증적 연산 과정(operations)과는 구조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채, 엄밀함의 형식적 표지들만을 전진 배치하는 관행을 뜻한다.



코퍼스-엔그램 (corpus-ngrams)
ngram.choiharam.com

연구에서 측정된 제도권 말뭉치를 탐색해 볼 수 있는 n-gram 표면(surface). 13개 기관의 데이터가 검색 가능하다. 위의 연구 결과 논문이 구조에 관한 것이라면, 이 인터페이스는 표면에 관한 것이다. 둘 다 필수적이다.



나유타 (웹 버전)
nayuta.choiharam.com

설치 작품의 웹브라우저 버전. 라이브로 렌더링되는 순전파(forward pass).



십자말풀이 (Crossword)
crossword.choiharam.com

전시회와 콜로키움에서 배포된 카드 크기의 십자말풀이 퍼즐. 단어들은 제도권 말뭉치에서 추출되었다. 이 퍼즐판은 내 프로젝트들 중 유일하게 주머니에 들어가는 크기의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