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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국제 미술 영어

이러한 영국의 중상류층 언어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할 수 있다. (a)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b)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지표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지위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것, (c) 이 엘리트 언어 형태는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 모방되는 경향이 있어 다른 방언 형태들이 점차 제거된다는 것, (d) 엘리트들은 이러한 모방을 인식하고 일반 대중(common herd)과 자신들을 구분 짓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적 정교함(linguistic elaborations)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E. R. 리치(E. R. Leach), 『고산 지대 버마의 정치 체계: 카친족 사회 구조에 관한 연구(Political Systems of Highland Burma: A Study of Kachin Social Structure)』, 1954년

국제화된 미술계(art world)는 독특한 언어에 의존한다. 이 언어가 가장 순수하게 표현된 형태는 디지털 보도자료(press release)에서 발견된다. 이 언어는 영어와 깊은 관련이 있지만, 단호하게 말해서 영어(English)는 아니다. 이는 주로 영어권(Anglophone) 세계에서 발현된 것이며, 현재의 확산세는 영어의 세계적 지배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언어에서 정말 중요한 것,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이것을 하나의 언어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이 언어가 줄곧 배양해 온 영어와의 예리한 거리감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우리는 우리가 국제 미술 영어(International Art English; IAE)라고 명명한 언어의 기묘한 어휘적, 문법적, 문체적 특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IAE의 기원을 고찰하고, 현대 미술(contemporary art)이 창작되고, 홍보되며, 판매되고, 이해되는 통로인 이 언어의 미래를 추측해 본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논증을 지나치게 공들인 농담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언어의 사용자들에게 이것은 전혀 우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 언어가 사용되는 규모는 여기에 걸린 이해관계(stakes)가 상당함을 증명한다. 우리는 상당히 진지하다.

가설 (HYPOTHESIS)

IAE는 모든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용자를 분류하는 동시에 결속시키는 사용자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그 공동체는 바로 예술계(art world)이며, 여기서 우리가 의미하는 예술계란 현대 미술(contemporary art)로서 공개되는 객체(objects)와 비객체(non-objects)를 만들기 위해 전문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이다. 여기에는 예술가와 큐레이터뿐만 아니라 갤러리 소유주와 디렉터, 블로거, 잡지 편집자와 필자, 홍보 담당자, 컬렉터, 자문가, 인턴, 미술사 교수 등이 포함된다. ‘예술계’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용어이지만, 흔히 쓰이는 대안인 ‘예술 산업(art industry)‘은 IAE의 실체를 반영하지 못한다. 만약 IAE가 단순히 전문적인 주제를 다루기 위해 필요한 표현들의 집합체였다면, 우리가 이를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IAE는 기껏해야 전문 어휘(technical vocabulary), 즉 자동차 정비사가 하모닉 밸런서(harmonic balancers)나 포퍼 밸브(popper valves)에 대해 논의할 때 사용하는 언어와 다를 바 없는 특화된 영어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비사가 모호한 자동차 부품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가 당신을 공통된 세계의 일원—동료 시민이라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동행자(fellow traveler)—로 호명(interpellating)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식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계가 최근 수십 년 동안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비엔날레(biennials)의 확산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대 미술 특유의 비지역적(nonlocal) 언어를 설명하려는 이들은 이를 환상적으로 유동적이고 화려한 이 세계의 에스페란토(Esperanto), 즉 더 나은 조율을 위해 도달한 합리적 합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 물론 20개국에서 제작된 예술품을 다카르(Dakar)나 샤르자(Sharjah)로 가져오는 전시를 기획한다면, 작가, 인턴, 갤러리스트, 홍보 담당자들이 공통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편의성만으로는 IAE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의 추측으로는,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언어를 채택한 이유는 인터넷의 배포 능력(distributive capacities) 덕분에 이제 그들이 자신의 글이 국제적인 청중에게 도달할 것이라고 믿거나, 혹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술에 관한 대부분의 소통은 여전히 모국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작가와 제작자, 지역 기자와 독자 등)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스코페(Skopje)의 한 미술학도가 자신의 졸업 전시를 알릴 때, 그녀는 IAE로 작성된 초대장을 이메일로 보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혹시 모르는 일(you never know)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동을 인식하고 그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예술계의 대표적인 디지털 기관인 e-flux를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현대 미술에 관한 소통에 있어 이플럭스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그 대유(metonym)이다. 설립자 중 한 명인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은 이 프로젝트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규정한다. 본질적으로 이플럭스는 전 세계의 현대 미술 행사에 관한 공지사항을 하루에 대략 세 건씩 발송하는 리스트서브(listserv; 메일링 리스트 서비스)이다. 비도클은 이메일의 양 때문에 이플럭스가 실제로는 현대 미술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actively involved)”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시사한 바 있다.

온라인상에서 이러한 종류의 정보를 교환하는 다른 방법들도 존재한다. Craigslist와 같은 서비스는 지역과 언어별로 행사를 분류할 수 있다. Contemporary Art Daily는 전 세계의 전시를 다루는 도판이 포함된 메일을 발송한다. 그러나 e-flux는 예술계의 열망을 완벽하게 집약한다. 공지사항을 보내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모든 제출물이 수용되는 것도 아니다. 예술계가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이플럭스 또한 큐레이팅(curated)된다. 영리 갤러리는 이플럭스의 핵심 공지 서비스 대상이 아니므로, 이 서비스는 그럴듯하게 비상업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최소한 그렇게 상상하거나 가정하기를—예술계의 모든 이가 이플럭스를 읽는다고 믿는다. (이 리스트서브의 구독자 수는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현대 미술 잡지인 Artforum의 두 배에 달하며, 전달된 메일함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다!) 온라인에 유통되는 현대 미술에 관한 수많은 글과 마찬가지로, 이플럭스의 보도자료들은 암묵적으로 예술계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수신자로 설정하고 있다. 즉, 이들은 오직 국제 예술 영어(IAE)로만 작성된다.

우리는 13년 치에 달하는 이플럭스의 모든 보도자료 공지사항을 수집했으며, 이는 언어 사용의 패턴을 나타내기에 충분히 방대한 텍스트 모음(corpus)이다. 이 에세이에 담긴 많은 관찰 결과는 바로 그 말뭉치(corpus)에 대한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스케치 엔진 모듈 1: 용례 색인 (SKETCH ENGINE MODULE 1: CONCORDANCE)

국제 예술 영어(IAE)의 문체적 경향을 조사하기 위해, 우리는 1999년 리스트서브(listserv)가 시작된 이래 발행된 모든 e-flux 공지사항을 Lexical Computing 이 개발한 용례 색인 생성기인 Sketch Engine에 입력했다. 스케치 엔진을 사용하면 용례 색인(concordances), 통사적 행태(syntactical behavior), 시간에 따른 단어 사용량 등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 사용을 분석할 수 있다. 우리는 독자들이 스케치 엔진을 사용하여 직접 검색해 봄으로써 우리의 분석을 따라와 보기를 권한다. 파란색 날짜를 클릭하면 원본 기사를 볼 수 있고, 빨간색 단어를 클릭하면 해당 문장을 확인할 수 있다.

어휘 (VOCABULARY)

우리가 예술에 관해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언어는 묘하게 포르노그래피(pornographic)와 같다. 즉, 그것을 보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점이다. 그 독특함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언어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거부감(squeamishness)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대상을 너무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특수한, 어쩌면 기이한 몰입(investments)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제 그 무언의 규칙을 깨고 IAE의 언어적 특징을 상세히 기술해 보고자 한다.

IAE는 독특한 어휘 목록(lexicon)을 가지고 있다: 아포리아(aporia), 급진적으로(radically), 공간(space), 제안(proposition), 생명정치적(biopolitical), 긴장(tension), 횡단적(transversal), 자율성(autonomy) 등이 그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은 필연적으로 심문하고(interrogates), 질문하며(questions), 부호화하고(encodes), 변형하며(transforms), 전복하고(subverts), 중첩시키며(imbricates), 치환한다(displaces). — 물론 실제로 이러한 일들을 수행하기보다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거나(serves to), 기능을 하거나(functions to), 혹은 그렇게 보이거나(seems to, 혹은 might seem to) 하는 경우가 많다. IAE는 명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영어를 꾸짖는다: 시각적인(Visual)은 시각성(visuality)이 되고, 세계적인(global)은 세계성(globality)이 되며, 잠재적인(potential)은 잠재성(potentiality)이 되고, 경험(experience)은… 경험 가능성(experiencability)이 된다.

‘공간(Space)‘은 IAE에서 특히 중요한 단어이며, 전통적으로 공간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일련의 실체들(인류의 공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상황에서 아주 명백하게 공간적인 것들(갤러리의 공간)을 지칭할 수 있다. 스페인의 무르시아 현대 미술 프로젝트(Proyecto de Arte Contemporáneo Murcia)에서 열린 2010년 전시 “지미 더럼과 그의 환유적 연회(Jimmie Durham and His Metonymic Banquet)“의 공지사항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작가가 “서구의 신성한 공간(Western sacred space) 내에서 내부와 외부의 구분에 의문을 제기하며”—전시장소는 과거 교회였다—“성소(sanctum)에 공간적 순수성(spatial purity)을 부여하기 위해 배제된 것들을 강조한다. 시멘트 조각, 와이어, 냉장고, 통, 유리 파편, 그리고 ‘신성함’의 잔해들은 전시실의 공간(space of the exhibition hall)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을 일종의 ‘혼돈의 사원(temple of confusion)‘으로 변모시킨다.”

IAE에서 공간적 공간과 비공간적 공간은 서로 치환 가능하다. 예를 들어 비평가 존 켈시(John Kelsey)는 작가 레이첼 해리슨(Rachel Harrison)이 “소매의 공간(space of retail)과 주관적 구조의 공간(space of subjective construction) 사이에서 즉각적인 혼란을 야기한다”라고 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간(space)’에 적용되는 규칙은 ‘장(field)’에도 적용되는데, 미술사학자 캐리 램버트-비티(Carrie Lambert-Beatty)에 따르면 “파라픽션(parafictional)이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곳인 “실재의 장(field of the real)”과 같은 식이다. (파라[para-], 프로토[proto-], 포스트[post-], 하이퍼[hyper-] 같은 접두사들은 어휘를 기하급수적으로, 그리고 ‘독어식으로(Germanly)’—즉, 새로운 단어를 실제로 추가하지 않으면서도—확장시킨다.)

IAE에 교차(intersection), 평행(parallel), 평행주의(parallelism), 공허(void), 감싸 안기(enfold), 내선(involution), 플랫폼(platform)과 같은 공간적 용어들이 넘쳐나는 것만은 아니다. IAE의 문학적 관습은 실제로 시각화하기 어려운 공간적 비유를 선호한다. 어떤 작업(practice)은 드로잉에서 아티스트 북에 이르기까지 “가로지르고(spans)”, 매튜 리치(Matthew Ritchie)의 작품은 아트포럼(Artforum)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과학 연속체(art-science continuum)의 균열을 우아하게 연결(bridge)한다.” 사단 아피프(Saâdane Afif)는 “자신의 파리 경험이라는 구체적이고 일화적인 한계를 넘어 자신의 아이디어를 펼쳐 보임(unfold)으로써, 더 일반적인 범위, 즉 새롭고 더 넓은 의미의 차원(dimension)을 아우를 것이다.”

또한 수많은 평범한 단어들이 비특정적이고 생소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작가 타니아 브루게라(Tania Bruguera)는 최근 아트포럼(Artforum)에서 “실재(Reality)는 나의 행동의 장(field of action)으로 기능한다(functions)”라고 쓴다. 과연 그렇다. ‘실재(Reality)’는 20세기 후반 영국 영어 사용 양상을 보여주는 영국 국가 말뭉치(British National Corpus; BNC)보다 이플럭스(e-flux) 말뭉치에서 4배 더 자주 등장한다. ‘실재의 것(The real)’은 BNC에서 100만 단위당 단 12회 등장하는 반면, 이플럭스 말뭉치에서는 100만 단위당 2,148회 등장하여 약 179배 더 자주 나타난다. 어떤 전시는 “대중을 색채 지각, 공간적 지향, 그리고 실재와의 다른 참여(engagement with reality) 형태들을 경험하도록” 초대하며, 다른 전시는 “현대적 실재들(realities)의 모델과 갈등의 현장들을 수집”한다. “실재 생존 전략(Reality Survival Strategies)”이라는 이름의 전시는 우리에게 “하위 실재(sub real)는… 실재의 찌꺼기들로 형성된다”라고 가르친다.

지난 봄 레드캣(REDCAT)에서 전시된 김범의 “아니말리아(Animalia)”(2011) 보도자료를 살펴보자. “드로잉, 조각, 비디오, 아티스트 북을 아우르는(spans) 확장된 작업(expansive practice)을 통해, 김범은 지각이 근본적으로 의심받는(radically questioned) 세계를 응시한다. 그의 시각 언어(visual language)는 기대를 유쾌하고 전복적으로(subversively) 뒤집는 무표정한 유머와 부조리한 제안(propositions)이 특징이다. 보이는 것이 보는 그대로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김범은 내면의 심리와 외부의 실재(external reality) 사이의 긴장(tension)을 드러내며, 관찰과 지식을 마음의 상태로서 연관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IAE의 본질적인 문법적 특징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근본적으로 의심받는(radically questioned)”과 같은 부사구와 “유쾌하고 전복적으로 뒤집는(playfully and subversively invert)”과 같은 이중 부사어(double adverbial terms)의 빈번한 사용이다. 특정 품사(“내면의 심리와 외부의 실재”) 내에서든 문장 전체에서든, 유사한 용어들을 짝지어 사용하는 것 또한 IAE의 필수 요소이다. 또한 미술 관련 글쓰기에서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인 종속절(dependent clauses)에 대한 의존도에 주목하라. IAE는 문장을 종속절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종속절을 뒤따르게 하여 행위(action)를 문장 깊숙이 매몰시킴으로써 기이한 정적(uncanny stillness)을 유도하도록 규정한다. 더 나아가, 기이한 정적과 활기 없는 균형(deadening balance)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IAE는 언제나 적은 단어보다는 많은 단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따라서 “조사(Investigations)”라는 전시의 보도자료는 작가 중 한 명이 “실재에 관한 또 다른 무언가, 즉 다른 정보(something else about the real, different information)”를 드러낸다고 기술한다. 올리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노란 안개(Yellow Fog)』(1998/2008)가 “해 질 녘—낮과 밤 사이의 전이 기간—에 상영될 때, 그것은 하루의 리듬에 나타나는 미묘한 변화를 재현하고 논평한다.” 만약 이러한 중언부언이 이 규칙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표면적으로 무관해 보이는 항목들을 그룹화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카트리나 제프리스 갤러리(Catriona Jeffries Gallery)는 윤진미(Jin-me Yoon)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곤충처럼, 혹은 부상자처럼, 혹은 심지어 도망자처럼, 윤진미는 그녀 특유의 숙련됨과 어색함의 조합으로 전진한다.” 반경제성의 원칙(principle of anti-economy)은 IAE가 목록(lists)에 의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2010년 “큐레이토리얼의 문화들(Cultures of the Curatorial)” 컨퍼런스 보도자료에서 필연적으로 길게 묘사되는데, 여기서 “큐레이토리얼(the curatorial)”은 “영화적인 것(the filmic)이나 문학적인 것(the literary)의 개념적 기능과 다르지 않은 실천의 형태, 기술, 형식 및 미학”으로 정의되며, “조직, 편찬, 전시, 프레젠테이션, 매개 혹은 출판과 같은 활동… 다수의 상이하고 중첩되며 이질적으로 부호화된 과업과 역할들”을 수반한다.

『아니말리아(Animalia)』 보도자료를 읽다 보면 일종의 형이상학적 멀미(metaphysical seasickness)를 느낄 수도 있다. 김범이 기묘한 “긴장”을 “응시”하고 “드러내지만”, 결국에는 그 무엇도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공간” 속에서는 발을 붙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예술에 관해 글을 쓰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뒤틀린 문장들은 거부할 수 없는, 심지어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진지하고 예술과 관련된 무언가에 가까이 있다고 느낄 때, 반사적으로 종속절을 찾아 손을 뻗는다. 문제는 그 이유이다. 어쩌다 우리는 서투르게 번역된 프랑스어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인가?

계보학 (GENEALOGY) 이플럭스(e-flux)가 오늘날 IAE의 용광로라면, 1976년에 창간된 학술지 옥토버(October)는 이 언어의 유력한 발원지 후보이다. 옥토버의 페이지 안에서,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와 연관된 미국의 형식주의 미술 비평 전통은 대륙 철학(continental philosophy)과 충돌했다. 미술사학자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와 아네트 미켈슨(Annette Michelson)을 포함한 옥토버의 편집자들은 당시의 비평을 본질적으로 난잡하고 유미주의적(belle lettristic)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더 엄격한 해석 기준을 추구했으며, 이는 수많은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t) 텍스트를 번역하여 영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옥토버로 대변되는 비평의 변화는 예술의 해석과 평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예술에 관한 글쓰기가 들리는 방식 또한 변화시켰다.

1979년에 발표된 크라우스의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Sculpture in the Expanded Field)」을 살펴보자. “그들의 실패는 이 작업들의 표면 그 자체에도 부호화(encoded)되어 있다. 문들은 깎여 나가고 반구조적으로 외피가 형성되어(anti-structurally encrusted) 그들의 작동 불가능한 상태(inoperative condition)를 외면에 드러내는 지점에 이르렀으며, 발자크(Balzac) 상은 너무나 높은 수준의 주관성으로 처결되어 로댕 자신조차도 (그의 편지가 증언하듯) 그 작품이 수용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크라우스는 옥토버를 위해 바르트(Barthes), 보드리야르(Baudrillard), 들뢰즈(Deleuze)를 번역했고, 그녀 본인 역시 그러한 번역 과정에서 단련된 듯한 문체로 글을 썼다. 그녀의 동료들 대다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인이거나 독일인이었기에, 아마도 그들은 실시간으로 스스로를 번역하고 있었을 것이다.

IAE의 수많은 독특한 어휘적 습관은 프랑스어에서 기원한다. 가장 명백한 것은 -ion, -ity, -ality, -ization과 같은 접두사들로, 이들은 -ness와 같은 더 소박한 대안들을 제치고 빈번하게 사용된다. 정관사와 부정관사의 기묘한 증식—“정치적인 것(the political)”, “부재의 공간(the space of absence)”, “인식 가능한 것과 혐오스러운 것(the recognizable and the repulsive)”—또한 프랑스어의 수입품이다. 예를 들어, 르 비드(Le vide)는 일반적으로 “텅 빈 것들”을 의미할 수 있지만, 포스트구조주의 번역가들은 “공허(The Void)”가 주는 기념비성(monumentality)을 분명 더 선호했다.

르 비드(Le vide)는 프랑스 웹 말뭉치(French Web Corpus)에서 100만 단위당 20.9회 등장한다. 반면 공허(the void)는 영국 국가 말뭉치(BNC)에서 100만 단위당 단 1.3회 등장하지만, 이플럭스(e-flux) 말뭉치에서는 9.8회 등장한다. (스케치 엔진 검색은 대소문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철자가 같은 단어인 멀티튜드(multitude)는 이플럭스 보도자료에 141회 등장한다. 어 랏(A lot)은 102회 등장한다.

프랑스어는 아마도 IAE에서 매우 흔하게 쓰이는 전치사구와 부사구들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동시에(simultaneously), ~하는 한편 또한(while also), 그리고 물론, 언제나 이미(always already)가 그것이다. IAE가 물려받은 많은 경향은 단순히 프랑스어 특유의 것이 아니라,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전용하거나 때로는 패러디했던(이 차이는 번역 과정에서 대부분 소실되었다) 지식인 계층의 문어체 프랑스어(highbrow written French)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프랑스어는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과 형용사적 동사 형태, 그리고 과거분사와 현재분사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점이 특징이다. 이것들은 미술 글쓰기의 문체적 인장(stylistic signatures)이 되었다.

프랑스어가 IAE의 유일한 비영어권 기원은 아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 또한 옥토버(October) 세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유산은 생산(production), 부정(negation), 전체성(totality)과 같은 단어의 자유로운 사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변증법(dialectics) 또한 도처에 널려 있다. (생산은 BNC보다 이플럭스 말뭉치에서 4배 더 자주 사용되며, 부정은 3배, 전체성은 2배 더 자주 사용된다. 변증법은 BNC보다 이플럭스 말뭉치에서 6배 더 자주 등장하는데, 100만 단위당 9.9회라는 빈도는 BNC에서의 햇빛(sunlight)만큼이나 IAE에서는 흔한 단어임을 의미한다.) 한 보도자료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류는 고양(elevation)을 열망해 왔으며, 중력에 대한 소외(alienation)와 굴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구해 왔다…. 높이와 의도적인 추락 사이에서 영구적인 진동 상태에 있는 이 물리적이고 실존적인 변증법(dialectic)은 우리를 균형의 한계를 탐구하도록 몰아넣는다.” 그렇다, 여기서의 주장은 단순히 서 있는 것조차 하나의 변증법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옥토버의 모방자들은 이 학술지가 보여준 의도적인 특징과 의도치 않은 특징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흉내 냈다. 크라우스와 그녀의 동료들은 단어 사용에 있어 일종의 분석적 정밀함을 지향했으나, 그로부터 몇 단계를 거친 뒤의 같은 단어들은 일상어처럼 무정부적으로, 혹은 표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변증법이라는 단어는 정밀하고—누군가는 과학적이라 할 만한—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IAE에서 이 단어는 보통 정서적인 함의로 사용된다. 즉, “좋은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옥토버의 후예들은 번역상의 우연들을 언어적 규범의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IAE는 이론적 영향력들을 어느 정도 미학적으로 전달하며, 이러한 영향력들의 굴절과 공식들을 자유롭게 결합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통합하는 스타일 안에 퇴적(sedimented)시킨다. (후기 미술 글쓰기에서는 예를 들어 교란하다[trouble]나 퀴어하게 만들다[queer]와 같은 단어들이 추가될 것이다.) 오늘날 가장 권위 있는 필자들은 비평이 스스로 무엇인지, 혹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다고 쾌활하게 주장한다. 옥토버 창간 직후의 몇 년간과는 달리, 이제 예술을 해석하는 데 있어 명확하게 지배적인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방법론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우리의 실질적인 해석 속에서가 아니라, 예술계의 보편적인 외국어(universally foreign language)의 정신과 문자 속에 말이다.

스케치 엔진 모듈 2: 워드 스케치 (SKETCH ENGINE MODULE 2: WORD SKETCH) 스케치 엔진은 ‘워드 스케치(Word Sketch)’ 기능을 통해 한 단어의 언어적 행태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특정 단어가 배치되는 다양한 방식과 다른 단어와 짝을 이루는 빈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사이드바에서 ‘워드 스케치’를 선택하고, ‘표제어(Lemma)’ 필드에 찾고자 하는 단어를 입력한 뒤, 검색하려는 단어의 문법적 형태를 선택하면 된다.

권위 (AUTHORITY) 영미권 예술 비평이 배양해 온 글쓰기 방식이 지닌 배타성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는 이해받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기를 요구했다. 수많은 번역상의 특이점(idiosyncrasies)에 기반하여 옥토버(October) 시대 동안 발전한 예술 글쓰기 언어는, 상당 부분 그것이 정당하게 ‘외래적(alien)‘이었기 때문에 소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영어권 독자 그 자체를 소외시켰으나, 그 언어에 익숙해질수록 거리감은 좁혀졌다. 표준적인 속임수들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이들은 식자층으로 대우받았다. 더 비의적(esoteric)인 뒤틀림에 편안함을 느끼는 이들은 아마도 번역된 프랑스어나, 적어도 번역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론과 장기간 접촉했을 가능성이 컸다. 즉, 예술 글쓰기는 독자를 변별해 냈다. 그리고 일부 필자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권위 있게 들릴 수 있었다.

여기서 권위(Authority)가 중요한 이유는 예술계가 일반적인 공산품(widgets)을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계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징적이며 해석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평가하는 능력—어떤 사물과 아이디어가 유의미하고 비판적(critical)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권력—은 매우 소중하다. 1960년대부터 대학은 급성장하는 미국 예술계로 진입하는 특권적인 경로가 되었다. 그리고 옥토버의 출현 이후, 그 세계는 특정한 종류의 언어적 기묘함을 체계적으로 보상해 주었다. 사람들은 이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여, 엄격하고 정치적으로 의식적이며 아마도 대학 교육을 받았을 법한 강력한 비판적 감수성을 내면화했음을 신호로 보낼 수 있었다. 거대하게 확장된 예술계에서 이 언어는 특정한 과업을 수행했다. 즉, 어떤 예술 작품들을 유의미하고, 비판적이며, 참으로 동시대적(contemporary)인 것으로 신성화(consecrate)하는 일이었다. IAE는 이전 시대의 예술을 해석하는 데 쓰였던 통사 구조와 용어를 초월하는 작업을 묘사하기 위해 발전했다.

다소 고고한 비평 담론과 연관된 이러한 매너리즘이 예술에 관한 모든 종류의 글쓰기에 스며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옥토버는 창간호부터 진지하게 번역된 투로 들렸다. 10년 후, 중류층 지향의 아트포럼(Artforum)의 상당 부분도 이와 비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직후 작가노트(artists’ statements), 전시 가이드, 기금 신청서, 벽면 텍스트(wall texts)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급격한 채택의 이유는 최근 전 세계 사람들이 예술에 관한 글을 쓸 때 글로벌 언어를 선택하게 된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목표는 엘리트 언어를 근사하게 모방함으로써 예술계에서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은 수준으로 모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 글쓰기를 문자 그대로의 내용으로 읽는 것은 종종 실수다. IAE는 내용 없이도 아름답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숙련된 독자들은 이 언어의 빈약한 변종들에 상당히 민감하다. 최근 뉴욕의 한 미술 석사(MFA) 전시에서 이 학교 미술사 석사 과정 학생들이 작성한 가이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작가]에 따르면 사물을 만드는 행위는 그녀가 과거와 현재를 통제할 수 있게 해준다.” 충분히 복잡하지 않은 IAE는 더 좋게 들리는 동시에 더 나쁘게 들리기도 한다. 그것은 더 명료할 수 있지만, 그 때문에 그 주장이 더 명백하게 터무니없어 보일 위험이 있다. 반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든 간에 거장다운(virtuosic) 언어 사용 앞에서는 위축되기 쉽다. 독일의 한 유력 미술 잡지가 발행한 이플럭스 보도자료는 “예술과 과학의 변증법(또는 종합)을 되풀이하여 상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예술적 연구 실천의 특수성과 그 가능성의 조건들을 밝히는 것”을 언급한다. 여기서 이 잡지는 IAE 내에서 변증법(dialectic)이 갖는 일반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를 역전시킴으로써 자신을 차별화한다. 이 잡지는 변증법이 지루하다고 비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잡지는 일반 독자보다 변증법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주장을 암묵적으로 펼치는데, 이는 이 특정 변증법이 너무나 따분해서 마찬가지로 따분한 ‘종합(synthesis)‘과 치환 가능할 정도라는 암시를 통해 강화된다. 변증법이 실제로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확립하는 권위다.

스케치 엔진 모듈 3: 히스토그램 (SKETCH ENGINE MODULE 3: HISTOGRAM) 직접 히스토그램(histogram)을 생성하려면 선택한 단어에 대해 용례 색인(concordance) 검색을 수행하라. 그다음 사이드바에서 ‘빈도(Frequency)‘를 선택한다. 새 창의 ‘텍스트 유형 빈도 분포(Text Type Frequency Distribution)’ 패널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유형(예: 연도별 또는 기관별)을 선택한 다음 ‘빈도 목록(Frequency List)‘을 클릭하면 된다.

내폭 (IMPLOSION) 비엔날레(biennials)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든 자유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현대 미술을 인터넷의 파놉티콘(panoptic)적 효과보다 더 많이 변화시킨 것은 없다. 이플럭스(e-flux)가 등장하기 전, 오클라호마 시티 미술관(Oklahoma City Museum of Art)이 뮌헨의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Pinakothek der Moderne)와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공지사항이 같은 날 발송되기 시작하자, 그들은 서로에게 유의미한—판독 가능한—존재가 되었다. 그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술계에서 언어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수많은 비엔날레에도 불구하고, 예술계의 관심 대부분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온라인에 머문다. 이플럭스의 평균적인 독자에게 예술 작품은 언제나 이미 국제 예술 영어(IAE)에 휩싸인 채 도착한다.

오늘날 예술계 엘리트들은 예술 해석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들은 주로 서로의 유동성(mobility)을 통해 서로를 알아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물려받은 문어체 언어는 점점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이고 있으며, 이들의 출신 성분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영어권 선구자들과 동일한 목표를 염두에 둔 새로운 사용자들은 이 언어를 익명으로 풍부하게 생산해 낼 수 있다. 보도자료는 도대체 누구의 편지함인지도 모를 곳에 신비스럽게 나타나며, 바로 그곳에 주의가 집중된다. IAE가 가장 인상적인 보폭으로 전진하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IAE라는 집단적 프로젝트는 능동적으로 글로벌화되었다. 언어적 모방과 우월성 과시의 행위들이 이제 웹 전역에 울려 퍼진다. (2009년에는 사변적인[speculative]이라는 단어의 사용량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급증했고, 2011년에는 단절[rupture]이 갑작스러운 열풍을 일으켰으며, 이제 횡단적[transversal]이 역대 최고의 해를 맞이할 준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위의 가해자들은 서로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는 수단을 그 어느 때보다 잃어버렸다. 우리는 분석적 용어들이 표현적이고 홍보적인 징표로 변모하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가설을 세운다.

참고: 스케치 엔진을 활용한 분석 스케치 엔진을 사용하면 시간에 따른 사용량을 추적하고, 이플럭스 말뭉치에서 특정 용어들이 어떻게 “유행(trend)“하는지 보여주는 빈도 분포 그래프인 히스토그램을 생성할 수 있다. IAE 시대의 전형적인 작가라 할 수 있는 리암 길릭(Liam Gillick)은 사례 수로만 따지면 2009년에 최고의 해를 보냈다. 그러나 해당 연도의 전체 단어 수 대비 상대적 빈도와 전체 말뭉치 내에서의 단어 빈도를 기준으로 보면, 그의 전성기는 2003년이었다.

언어가 확산됨에 따라 방언(dialects)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프랑스 보도자료의 IAE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인데, 이는 (우리의 상상일 뿐이지만) 프랑스인 인턴들이 미국인 인턴들을 모방하고, 그 미국인 인턴들은 다시 프랑스 학자들을 모방하는 미국 학자들을 모방하여 쓴 글이기 때문이다. 반면 스칸디나비아의 IAE는 형편없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 필자들은 영어를 외국어로서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안일한 자기과신에 사로잡혀 IAE에 대한 감각(ear)을 갖추지 못한 듯하다.

“비욘드(Beyond)“라는 적절한 제목이 붙은 2006년 광저우 트리엔날레(Guangzhou Triennial)의 이플럭스 보도자료는 다음과 같다. “현대화를 위한 경이로운 실험 공간은 [4천만 명 규모의 메가시티가 계획된] 주강 삼각주(Pearl River Delta)를 전형적인 개발 지역 중 하나로 삼아, 가능성과 혼돈으로 가득 찬 경이로운 현대화 프레임워크 내에서 현대 미술을 연구한다. 주강 삼각주(PRD)는 새로운 공간 전략, 경제 패턴 및 라이프스타일을 상징한다. 이 경이로운 공간을 예술적 실험과 실천의 플랫폼(platform)으로 간주하라. 동시에 이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실험적 표본(sample)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번역본을 통해 바타유(Bataille)를 무의식적으로 흉내 내는 이들이 중국 문화부의 인턴들일 수도—혹은 아닐 수도—있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징후다. 핵심은 이제 예술계의 언어로 능숙하게 글을 쓰는 데 있어 영어를 배우는 것이 더 이상 전제 조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영어에 대한 또 다른 승리처럼 보이며, 우리가 익숙해진 예술 글쓰기가 점점 더 황홀하게 의미의 닻을 내리는(semantic unmooring) 과정을 약속하는 듯하다. 그러나 IAE의 급속한 발전을 이끌었던 조건들이 사라진 지금, 이 언어는 실존적 위기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 IAE는 단 한 번도 성문화된 문법을 가진 적이 없었다. 대신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원을 통합하고 ‘외국어처럼 들리게 하는’ 전술을 구사하며 영어 화자의 관점에서 이해 가능성(intelligibility)의 한계를 밀어붙임으로써 진화해 왔다. 하지만 이제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해 적절한 소외감을 느껴줄 글로벌 독자층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엄중함을 감지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다. 끊임없이 이어져 온 비평의 위기는 21세기 첫 10년이 끝날 무렵 최고조에 달한 듯 보였다. 미술사학자이자 비평가인 스벤 뤼티켄(Sven Lütticken)은 비평이 “지적인 카피라이팅(highbrow copywriting)“에 불과하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현대 미술의 상업적 조건에 의해 진지한 비평이 어떤 식으로든 작동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생각은 최근 몇 년간 충분히 자주 표현되어 왔으나, 시장이 어떻게 비평의 권위를 짓밟았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뤼티켄의 명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지적인 비평이 더 이상 일반 광고 문구(copy)와 다르게 들린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인가? 전통적으로 IAE의 엘리트 혁신가였던 비평가들은 더 이상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는 익명의 적대자들에 의해, 자신들의 주무기인 언어 게임에서 패배할 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광저우의 사례를 다시 보자: “도시는 도시의 기성 개념을 넘어서는, 새롭게 형성된 거대한 집합체(huge collective body)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모든 쟁점을 포괄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이로운 공간이자 실험의 장(experiment field)이다.” IAE에 자신감 있는 독자라면 이것이 꽤 괜찮은 결과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초적 정의의 “기성 개념”을 초월하며 중언부언하면서도 모호하게 정의된 현상을 마주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이 있고, 불필요한 정관사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정관사의 위치가 틀렸다. “covers all issues and is free from the time and space limit”이라고 써야 하지 않겠는가? 대체 누가 이 글을 썼단 말인가? 하지만 잠깐, 어쩌면 이것은 아방가르드(avant-garde)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IAE가 없는 예술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만약 보도자료가 그 주제의 진지함을 타전(telegraph)할 수 없다면, 그저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특유의 언어가 없다면, 예술은 더 넓은 대중과 지역 대중의 정밀한 조사(scrutiny)에 굴복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견뎌낼 수 있겠는가?

만약 IAE가 내폭(implodes)한다면, 우리는 세계화된 예술계의 언어가 중립적이고 포용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예술계의 엘리트들이 관습적인 지식인 영어(highbrow English)와 그것이 부과하는 신뢰할 만한 구별 짓기를 선택할 가능성이 더 크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IAE의 이 퇴폐적인 시기를 즐겨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기에 이미 많은 이들이 그러하기 시작했듯, 우리 역시 이플럭스(e-flux)의 보도자료를 그 내용이나 IAE에 대한 기술적 능숙함 때문이 아니라 그 서정성(lyricism) 때문에 읽어야 한다. 다음의 보도자료를 운율에 맞추어 재구성한 것을 보라:

피터 로지어스(Peter Rogiers)는 합성수지와 주조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물질을 고투하며 뚫고 나간다 “우리의” 세계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는 싱크가 맞지 않는 비스듬하고 “다른” 이미지를 생성하기 위해. 그 안에 진정한 예술적 생산(artistic production)의 핵심과 본질이 있다— 시각적 인식을 약화하고 인간을 상상의 궤도로 밀어 넣는 가소성 형태(plastic shape)를 빚어내려는 욕망. 피터 로지어스는 모든 개인적 관심사를 멀리한 채 그 어떤 형태의 나른한 예술(languid art)에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용기 있는 고집으로 자신의 예술에 매진하는 조각가 중 한 명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의 새로운 드로잉은 세계가 기울어지고 상상이 때 묻은 실재(grimy reality)를 쫓아내는 포착된 사유의 틀(thought-moulds)로 더 깊이 고찰될 수 있다.

우리는 피터 로지어스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려는지, 어디 출신인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마치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